
저는 얼마 전까지 스테이블코인을 그냥 "가격 안 떨어지는 코인"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비트코인처럼 투자 수익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왜 굳이 코인으로 달러를 들고 다니는지 이해가 안 됐거든요. 그런데 이게 단순한 금융 상품이 아니라, 지금 미국이 달러 패권을 지키기 위해 꺼내든 카드라는 걸 알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달러 패권이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
미국 국채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냥 지나치는 숫자인데, 2024년에 미국의 국채 이자 지출이 국방비를 처음으로 넘어섰습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미국이 5대양 6대주에 군사력을 유지하는 비용보다 빚 이자를 더 많이 내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 시점을 2035년쯤으로 예상했던 전문가들이 많았는데, 코로나 이후 대규모 통화 공급과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한 금리 인상이 겹치면서 10년이나 앞당겨진 것입니다(출처: 미국 의회예산처(CBO)).
여기서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브레튼우즈 체제란 1945년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주도로 만들어진 국제 금융 질서로,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고 전 세계 각국 통화가 달러를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설계된 시스템입니다. 이 체제는 무역 흑자국들이 달러를 벌어 미국 국채에 재투자하는 순환 구조 위에서 70년 넘게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 균형을 깬 나라가 중국입니다.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은 무역 흑자로 벌어들인 달러를 미국 국채 대신 일대일로 정책, 즉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을 연결하는 자국 주도 인프라 투자에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채권을 사줘야 할 큰 손이 사라진 셈이고, 저는 이게 미·중 갈등의 표면적 원인들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테더(USDT)가 갑자기 살아남은 이유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처음 커진 건 사실 미국 정부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2017년 중국 정부가 가상자산 거래소를 전면 폐쇄하면서, 비트코인을 사고 싶은 중국인들이 위안화로는 거래가 불가능해졌습니다. 이들이 선택한 우회로가 바로 테더(Tether)가 발행하는 USDT였습니다.
USDT란 테더라는 민간 기업이 1달러를 받고 발행하는 달러 연동 토큰으로, 언제든 1달러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이 단순한 구조 덕분에 USDT는 현재 달러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약 70%를 점유하는 압도적 1위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미국 당국은 이 테더를 오랫동안 눈엣가시로 여겼습니다. 뉴욕 남부 연방검사청이 약 10년간 테더에 벌금을 물리고 회계 투명성을 압박했는데, 재미있는 건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이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은 달러 스테이블코인 법안이 상원에서 한 차례 부결되자 "일생일대의 기회를 정쟁으로 날리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결국 지니어스법(GENIUS Act)이 재발의·통과되면서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공식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지니어스법이란 달러 스테이블코인 발행 기업이 지켜야 할 가이드라인을 명문화한 법으로, 일정 요건을 갖추면 민간 기업도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합법적으로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입니다. 미국 정부가 이걸 밀어붙이는 진짜 속셈은 결국 하나입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이 운용 자금으로 미국 단기 국채를 매입하게 만들어, 외국 정부가 사주지 않는 국채를 전 세계 개인들이 간접적으로 흡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은행 붕괴 이유
제가 이 부분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좀 과장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은행이 무너진다는 건 너무 극단적인 표현 아닐까 하고요. 그런데 구조를 뜯어보니 단순한 엄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스위스로 무역 대금을 보낼 때 중간에 통과하는 은행이 평균 6개나 됩니다. 각 은행은 수수료를 가져가고, 처리 시간도 며칠씩 걸립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이 과정을 건너뜁니다. 원화를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바꿔서 보내면 상대방 폰에서 스위스 프랑으로 떨어지는 구조인데, 중간에 은행망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수수료도, 대기 시간도, 국가의 통제도 없습니다.
실제로 나이지리아 같은 나라에서는 페이팔로 달러를 받으면 국가가 강제로 나이라로 환전해 버리는데, 이 공식 환율이 지하경제 환율보다 훨씬 불리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이지리아 엔지니어들이 달러 결제보다 USDT 결제를 선호한다는 이야기는 제가 접하고 꽤 놀란 사례였습니다. 이미 개발도상국에서는 현실이 된 얘기입니다.
탈중앙화 금융(DeFi)이라는 개념도 여기서 연결됩니다. DeFi란 은행 같은 중앙 기관 없이 블록체인 위에서 대출·예금·거래가 이뤄지는 금융 시스템을 말합니다. 현재 DeFi 생태계와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유통되는 결제 수단의 대부분이 이미 스테이블코인입니다(출처: CoinGecko). 블록체인 경제의 기축통화 역할을 스테이블코인이 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만 제 생각에는 "은행이 무너진다"는 표현은 다소 드라마틱하게 들립니다. 은행도 결국 적응할 것이고, 실제로 글로벌 대형 은행과 자산운용사들은 이미 자체 스테이블코인 발행과 블록체인 결제 시스템 구축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은행의 역할, 특히 중개 수수료를 먹는 구조가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건 맞다고 봅니다.
한국에게 기회가 있는 이유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확산되면 원화 가치가 어떻게 될까요? 직관적으로는 원화 약세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입니다. 한국인들이 스마트폰에서 원화를 팔고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어지면, 한국은행은 원화 약세를 막을 브레이크를 잃게 됩니다. 결국 원화를 강하게 유지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어집니다. 통화 주권이 실질적으로 줄어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국이 집중해야 할 포인트가 생깁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원화는 전 세계에서 쓰이는 망이 아니기 때문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어봤자 달러 스테이블코인 앞에서는 경쟁이 안 됩니다. 반면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그 자체가 전 세계 모든 통화와 연결되는 결제망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기업들이 달러 스테이블코인 발행과 결제망 사업에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삼성, 네이버, 카카오 같은 기업이 달러 스테이블코인 기반의 글로벌 결제 인프라를 구축한다면, 이건 단순한 핀테크가 아니라 금융 네트워크 사업입니다. 스마트폰을 제조품이 아니라 금융 인프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스테이블코인 시장 확대의 수혜를 받을 수 있는 분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더리움(ETH): DeFi와 토큰화 자산(RWA) 거래 대부분이 이더리움 블록체인 위에서 이뤄짐
- 솔라나(SOL): 빠른 처리 속도와 낮은 수수료로 결제 체인으로 부상 중
- 스테이블코인 발행 기업: 테더, 서클(Circle) 등 직접 발행사
- 블록체인 결제 기업 및 거래소: 결제망 인프라를 장악하는 기업들
RWA(실물자산 토큰화)란 부동산, 채권, 주식 같은 실물 자산을 블록체인 위에 토큰 형태로 올려 거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장이 성장할수록 거래 대금의 상당 부분은 스테이블코인으로 결제될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스테이블코인의 유통량과 중요성도 함께 커지게 됩니다.
스테이블코인을 직접 들고 있는다고 투자 수익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생태계가 커지는 방향을 읽고 관련 인프라와 기업들에 관심을 두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스테이블코인 자체보다 이것이 만들어내는 결제망의 변화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1에서 2로 가는 초입일 수 있지만, 2에서 10으로 가는 속도가 얼마나 빠를지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